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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업적 평가 쇄국정책 서원철폐



한국사에서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인물중 하나인 흥선대원군.


이 흥선대원군의 업적 후일의 평가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뤄본다.


흥선대원군 출생은 1820년 12월 21일 

생년월일 그리고 1898년 2월 22일에 

생을 마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흥선대원군 작호는 흥선 시호는 헌의로

전주 이씨 성씨를 사용하고 있다.


흥선대원군 생애 종교는 유교에서

후에 불교로 바꼈다.


박은식이라는분에 의하면 흥선대원군은

"용맹하고 과감 번개처럼 빠르고 변통에 능했으니

실로 정치의 대혁명가라 말할 수 있다" 라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평가가 사람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리는 정치인이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왕손

직계와는 거리가 좀 있었고 아버지 남연군이

이복동생의 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가까워졌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 호포제

서원철폐 의정부 삼군부 설치 사창제 실시

등을 시행했다.




특히 그중에서 경복궁 중건에 대해 

매우 비난적으로 평가가 되는대

후일을 바라보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나 당대 사회적

분위기,조선의 자금력을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공사를 해야 했을까

라는 의견이 나올정도로 무리한

정책이었다고 바라본다.


경복궁 중건을 위하여 당백전을 발행했는대

당백전으로 인해 자금융통에도 무리가 갔다.





흥선대원군의 인물됨을 바라보자면

밑과 같은 발언이 전해져온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것이라면 비록

공자가 살아 돌아서 온다고 해도 

용서를 할 수 없다"


이 발언이 매우 유명하긴 하지만

조선실록에 기록이 되어 있진 않다.




흥선대원군의 일화중 거짓일화가

많기로 소문났는대 그 거짓일화에

대해서는 '나무위키'를 참고하라.

(너무 많아서 적을수 없다.)


한번씩 진품명품에서 흥선대원군이

직접 그렸다는 난들이 나오는대

대다수가 위작으로 판명되는게 현실.


그당시 명필로 불러지던 추사 김정희에게

난을 그리는 방법을 직접 배웠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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